CokCok

대한민국 식량난을 해결한 과학자 우장춘의 업적과 일대기 본문

인물

대한민국 식량난을 해결한 과학자 우장춘의 업적과 일대기

LJay 2013. 10. 11. 18:22



우장춘은 씨없는 수박을 개발한 사람이라고 널리 알려져있으나,

사실 우장춘은 일본인이 만든 씨없는 수박을 한국에 들고 왔을 뿐

직접 만든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씨없는 수박따위보다 더 대단한 우장춘 박사의 업적 관련 글이 있어서 퍼왔습니다.





1. 우장춘 박사는 일제와 전쟁이 말아먹은 불모지 쑥대밭 한반도를 먹고 살만한 땅으로 바꿔 놓은 구국의 위인. ㅇㅇ

이분은 출생부터가 기구해. 1898년 생인데, 아버지가 친일부대의 대대장으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역적 우범선 이었음. ㅋㅋㅋ.

하지만 아관파천으로 전세 역전, 일본으로 망명한 '친일파' 우범선, 일본인 사카이 나카와 결혼해 2남을 생산하는데 그중 장남이 우장춘 임.  

우범선은 우장춘의 나이 5살에 대한제국이 보낸 자객에 살해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고영근이라는 열사가 우국충정으로 스스로 도일 하여,  수개월간 우범선과 친분을 쌓아 믿게 만든 후 살해했다고해.


이때부터 우장춘 가족은 그야말로 떠돌이 집시만도 못한 최악의 삶을 살게 돼. 

조선에선 배신자 역적의 가족, 일본에선 이용가치 없는 쓰레기 다문화 가족으로 전락한 거임. 유쾌상쾌통쾌~

과부가 된 장춘의 어머니는 극심한 경제적 빈곤에 시달려, 우장춘을 고아원에 맡겨 버려. 그리고, 조선인 우장춘은 왜인 고아원생들의 무지막지한 이지매 공격에 시달림.


일반적으로 어린 시절 가난하고 힘들고 폭력에 시달리다 크면 나중에 일탈행위를 하기 마련인데 우장춘은 그 반대였다고해. 그는 '졷까 ㅆㅂ, 기어코 훌륭한 사람이 되서 너희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뭐 어쨌든, 장춘의 어머니도 훌륭한 여인었던 모양이야. 기어코 돈을 벌어 장춘을 집으로 데려와 대학까지 보낸다. 것도 그냥 대학이 아니라 동경제국대학으로.

으리으리~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을 졸업한 장춘은 일본 농림성에 취업해 혁혁한 업적을 쌓으며 승승장구해.

하지만 1937년 어느날 갑자기 해임된다.

이유는 일본 이름을 쓰지 않아서.

다꽝들 그때나 지금이나 졸라 졸렬 졸렬해..

그래서 우장춘이 일본에서 살아남는 길은 일본인이 되서 일본 이름을 쓰는 것 밖에 없었어. 실제로 그는 결혼하려고 일본인의 양자가 돼.

 

그리고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지.

 

근데 정작 자신의 업적을 남기는 논문과 공문 기록에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한국 성인 "우"를 집어 넣었다.  

우장춘에게 비춰진 일본은 혹독한 굶주림과 차별과 폭력의 나라였어. 본인은 일본에서 이민자가 얻을 수 없는 엄청 높은 지위를 얻긴 했으나 그건 순전히 장춘이 혼자 잘나서 그렇게 된 거고. 자신의 가족을 그토록 짓밟았던 제국주의에 미쳐 날뛰는 나라, 일본은 우장춘에게 영원히 함께 하지 못할 적국일 뿐이었지.

그래서 그는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에 매달렸다고해.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은 우장춘을 역적의 아들로 낙인 찍었으나, 여전히 조선은 그의 뿌리이자 (자신처럼) 일본에게 짓밟힌 약자였다. 

장춘의 기구한 운명..ㅜㅡ

해임 후 지방의 농장장으로 재취업, 연구 활동에 몰두하던 우장춘은 여생을 그냥 그렇게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지. 육종학계 최고 권위자라는 명예를 간직한 채 일본 이민자 역사에 빛나는 태양으로 남을 수 있었어.

하지만 이때, 일제로부터 해방된 반도국이 그를 애타게 찾기 시작한 거다.

해방 후 대한민국은 1947년부터 농업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실력자 장춘을 , "같은 민족"이라는 미끼로, 영입하고자 했다.

감성팔이 ㄷㄷ해...


당시 한국은 미리 한국 농업 과학연구소를 만들어 놓고 소장 자리를 우장춘을 위해 공석으로 놓고 우장춘의 가족에게 "이적료"로 1백만엔을 보낼 정도로  필사적이었지. 당시 1백만엔이면 '남편이 죽었어요 10억을 받았어요' 수준의 엄청난 돈이래.

장춘은 출신 성분때문에 난 조선에서 죄인이겠지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조선이 먼저 "어서오쎄요"라고 걸보고 무척 감격했던게 분명해.

이런 사실들을 보면 연좌제처럼 부모 출신 성분만으로 자식들까지 매도하는 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가족을 위해 쓰라고 준 돈 1백만엔을 탈탈 털어 한국에 심을 종자를 사는데 사 써 버려.

그리고 당시(1950년) 한국 전쟁이 한참이었던 부산에 와서 그 나이에 군복무까지 했어. 당시 높으신 양반들은 군면제시켜 주려고 했는데 우장춘은 싫다고 했데.



암튼, 공석으로 남겨뒀던 한국 농업 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한 우장춘. 근데 소장이면 뭐하냐? 전쟁으로 쑥대밭된 나라엔 아무것도 없었어. 

당시 연구소는 소장 자리만 만들어 놓고 잠 잘 곳도 씻을 곳도 수돗물 나오는 곳도 전기 들어오는 곳도 안 만들어 놓았다고 해. (심지어 입을 옷도 없어서 우장춘 소장은 행사장에 누더기 외투에 고무신 끌고 나가셨단다.)

이런 참담한 상황에서 10 여년 동안 우장춘은 대한민국을 기어코 구원하시고야 마는데, 그 업적의 핵심은 바로,

우량 종자 개발.

농업만 그랬겠냐만은 일제 치하의 조선은 철저하게 일본에 종속된 '식민농업지' 였어. 일본에서 종자를 들여와 일본식 기술로 농사를 지어야 했는데, 일본이 패망한 뒤로는 그게 불가능해 진 거지.

식량조차 자급자족이 안되는 나라, 이 처절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우수 종자를 개발하는 것이었을거야. 식량 작물은 키워 놓으면 지가 알아서 씨를 틔워 번식하는게 아닌 모양이야. (난 영농기술에 잘 모르지만) 인공적으로 종자를 개발해야 생산성이 높아지고 사람들을 먹여살릴 수 있었던 모양.

다시는 농대를 무시하지 마라.

장춘은 가장 먼저 우량 종자 개발에 주력, 최단시간 내에 배추, 무, 고추, 오이, 양배추, 양파, 토마토, 수박, 참외 등에 걸쳐 20여 품종에서 종자를 확보하게되. (그 외에도 한해 두번 수확하는 벼 품종 개발 등 무수히 많단다)

이로서 대한민국에 현대 농업기술이 시작됐고 국민들은 기아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어. 
뿐만 아니라 우장춘이 손을 댄 우량 종자들은 외국 것을 능가하는 엄청난 품질이었다고해.

우장춘이 얼마나 천재였는지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바로 제주 감귤이야.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