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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이영갑의 탈북 스토리 - 밥한그릇 때문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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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이영갑의 탈북 스토리 - 밥한그릇 때문에

LJay 2013. 9. 24. 22:58

탈북자 이영갑씨의 글입니다.

 

나는 북한에서 살 때 비교적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고지식하다는 말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어리숙하다는 뜻이다.

북한정권은 주민들 (당원들과 근로자들)에게 고지식은 미덕이라는 교육을 많이 했다.

"장군님(김정일)의 정책을 조금이라도 의심하지 말아야"

이 말을 나는 당 회의 때 많이 들었고 또 그렇게 살았다.

북한의 영화나 선전물에도 "고지식은 당원의 미덕"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나는 순수하고 고지식한 당원이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충성하는 것이 당원의 본분,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만 인생을 무난하게 살아갈수 있는 곳이 북한사회였다.

나 역시 무난하게 살려면 정권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잊지않고 살았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 나는 가족을 잃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시키면 시키는대로 사는데 습관되어 있었다.

집을 떠나 산판의 벌목장과 발전소 건설장, 국가에서 진행하는 대상건설장을 비롯한 열악하고 힘겨운 곳에 수없이 동원되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그런 곳에 가기 싫어 구실을 대고 발뺌을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나는 바보였다.

나는 아내가 죽었을때에도 집에 없었다. 평양-남포고속도 도로 건설에 동원되어 있었다.

아내는 굶어죽었다.

혼자 세 자식을 키우면서 고생하다가...

아내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집에 돌아온 나는 아내의 시신앞에서 울지도 못했다.

나는 그때 북한정권이 주민들에게 늘쌍 설교하는 충성과 고지식함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을 통절히 깨달았다.

억울하게 저세상으로 간 아내에게 너무 죄스러웠다.

아내가 죽은 후 나는 홀로 세 자식을 키우며 살아야 했다.

아내는 열두살과 아홉살, 일곱살이 된 세 자식들을 남겨놓고 죽었다.

일곱살인 막내는 딸애였다.

그때는 사방에서 사람들이 무리로 굶어죽던 1996년이었다.

나는 홀로 세 자식을 키우며 전에 아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하루 세끼를 굶기지 않고 먹이기 위해 못해본 일, 못해본 짓이 없었다.

봄에는 산골짜기의 부대기 농사를 했고 여름에는 강가에서 사금채취를 했다.

겨울에는 장사를 다녔다.

가을에는 농장 밭에 들어가 도적질도 했다.

그렇게 하루도 쉬지않고 일했지만 나는 자식들에게 한 번도 배불리 밥을 먹이지 못했다.

나는 그때 최악의 굶주림을 견디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굶어죽기가 정승하기보다 힘들다"는 속담의 뜻을 알았다.

아이들에게 굶주림을 참고견디라는 말이 야만적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못해 날이 갈수록 허약해 질때면 식욕은 참기 어렵게 왕성해진다.

특히 아이들이 그 강렬해진 식욕을 억제하며 굶주린다는 것은 참기어려운 고통이라고밖에 말할 수 업다 .

정승도 3일을 굶으면 도적질을 한다는 말이 그래서 생겨난 것 같다.

나는 아침에 일하러 가면 항상 저녁 늦게야 돌아오군 했다.

옥수수나 기타 먹거리를 구하러 부근 농촌에 장사를 갈때면 이틀씩, 사흘씩 집에 오지 못하기도 했다.

그럴때면 어린 세 자식들은 어른 없는 집에서 무서운 밤을 보냈다.

나는 아침에 일하러 갈때면 항상 어린 세 자식들의 점심밥을 따로따로 공기에 담아 두군 했다.
멀리 갈때에는 저녁밥까지 공기에 담아 찬장안에 놔두군 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접심이나 저녁때를 기다려 자기 밥 그릇을 꺼내먹군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아이들은 나중에 밥시간을 맞춰 먹는 것이 아니라 음식물이 있으면 보는 족족 먹어치우군 했다.
점십밥을 그릇에 담아 찬장안에 넣어두면 아버지가 일하러 가기 바쁘게 모두 꺼내 먹어치웠다.

그리고는 접심을 굶었다.

먹을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형이 동생밥을 훔쳐먹기도 하고 동생이 형의 밥을 훔쳐먹기도 했다.

나는 처음에는 타이르다가 나중에는 속이 타서 화를 내고 심지어 어린 자식들을 두둘겨 패기도 했다.

당시 나에게 절박한 것은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굶겨죽이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주변에서 애들이 하루 한끼만 배불리 먹고 다음 두끼는 굶는 비정상적인 식습관을 지속하다가, 나중에는 허약해지고 또 그 허약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어간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래서 비록 풀에다가 옥수수가루를 조금 넣고 끓인 영양가 없는 음식이지만 그것이라도 자식들에게 정상적으로 먹이려고 애썼다.

나는 어린 자식들이 아침에 점심저녁밥까지 먹어치우는 비정상적인 음식섭취와, 굶주림으로 왕성해진 애들의 식욕을 절제시키는 싸움에 매까지 들어야 하는 자신이 너무 비참해 자살해 죽을 생각도 몇 번씩이나 했다.

사는 것이 너무 고달팠다.
허지만 죽고 싶어도 어린 자식들 때문에 죽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나는 이웃 농촌부락으로 장사를 떠났다.
죽은 아내가 평소에 입던 옷가지들과 나의 손목시계를 가지고 농촌에 가서 옥수수 몇 키로를 바꾸어 오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아침에 집을 나설때 저녁에 늦게 돌아올 것을 예견하여 어린 세 자식들의 저녁밥까지 지어 담아놓고 떠났다.

나는 그날 몇십리를 걸었다.

농촌부락의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입던 옷가지들과 손목시계를 사 달라고 구걸했다.
장사가 아니라 구걸이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어렵게 사는 세월이어서 사람들은 선뜻 내가 들고다니는 물건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나중에 작은 농촌부락의 한 노인이 초줴한 나의 몰골을 측은히보더니 "자네도 몹시 급한 모양이군"라고 중얼거리며 강냉이 3kg을 내다주고 내손에서 손목시계와 입던 옷가지들을 받아주었다.

나는 강냉이 3kg을 들고 나는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아홉살짜리 둘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오길 기다린듯 막내 딸애가 울먹이며 말했다.

"작은 오빠는 아버지가 나간 다음에 내 밥과 큰 오빠밥을 몽땅 훔쳐먹고 도망쳤어"

나는 어렵지 않게 내가 없는 사이 집에서 있은 일을 짐작했다.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허약해진 둘째가 참지 못하고 제형과 동생의 밥까지 훔쳐먹은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욕설이 무서워 집에서 도망친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아이들에게 음식을 대충 해먹이고 집을 나섰다.

둘째가 갔을만한 곳을 모조리 찾아헤맸다.

평소에 밥 한그릇 때문에 아들애에게 욕을하고 매질까지 했던 자신을 가슴아프게 돌이켜 보며 역전 대합실과 집 근처의 다리아래, 장마당의 구석구석을 찾아보아도 둘째는 없었다.

다음 날도 나는 종일 둘째를 찾아헤맸지만 그애는 나타나지 않았다.

둘째는 두달 후 시체가 되어 나의 앞에 나타났다.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매일같이 둘째를 찾아 헤매는 나에게 안전부(지금의 보안서)에서 연락이 왔다.

두만강에 빠져죽은 아이시체를 하나 발견했는데 혹시 잃어버렸다는 둘째가 아닌지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두만강으로 달려갔다.

두만강으로 달려간 나는 가슴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두만강에 빠져죽은 아이는 둘째였다.

둘째는 몰래 중국에 건너가서 (움쳤는지 아니면 구걸했는지 알 수 없지만) 강냉이 몇 키로를 얻어가지고 집에 오려고 두만강을 건느다가 죽었다.

둘째가 건너오다가 죽은 두만강의 멀지않은 곳의 여울가에는 작은 강냉이 자루가 하나 걸려 있었다.

둘째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억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는 나에게, 둘째의 시체를 처음 발견했다는 국경경비대 군인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

"강냉이 자루를 등에 지지 않고 강을 건넜으면 죽지는 않았을텐데..."

결국 아홉살 밖에 안된 어린애가 강냉이 자루를 업고 강을 건느다가 죽었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날 둘째를 두만강가의 산기슭에 묻고 오랫동안 울었다.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사람처럼 살아보지 못하고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어린나이에 억울하게죽은 둘째의 무덤앞에서 나는 가슴을 칼로 에이는것 같은 아픔을 느끼며 소리내어 울었다.

그 날 나는 처음으로 국가에 대한 반감을 가져보았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고 수많은 사람들과 어린 아이들이 비참하게, 불쌍하게 숨져가는데 국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또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아홉살인 둘째 아들을 억울하게 저세상으로 보낸뒤, 주변사람들은 나를 보고 멍청해졌다는 말을 자주했다.

나도 자신이 전과 달리 삶에 대한 욕망이 깡그리 없어지는 것을 종종 느꼈다.

아홉살의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죽은 둘째아들을 때없이 생각하면서 슬픔과 함께 비관에 젖어 자살이라도 하고싶을만치 의욕을 잃군 했다.

그러나 나는 무맥하게 손맥을 풀고 있을 수 없는 처지였다.

나에게는 열두살인 큰아들과 일곱살인 막내딸이 달려 있었다.

억지로라도 살아야 했다.
 
수백 만명이 굶어죽은 "고난의 행군"시절, 다른 사람들도 그랬겠지만 나의 어린 자식들은 못먹어본것 이 없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풀과 풀뿌리,술찌꺼기와 된장찌꺼기, 나무껍질과 두부찌꺼기를 비롯해서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먹었다.

짐승도 안먹는 것을 먹고 살았다.

옥수수가 생기면 약처럼 풀에 조금씩 섞어 끓여먹었다.

그때 절감한 것인데 아이들이 굶주림과 영양실조에 시들어 가는 것은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애처롭고 가슴이 아프다.

북한에 "흉년에 아이 배터져 죽는다"는 속담이 있다.

그 속담의 뜻은 옛날부터 아무리 기근이 들어도 아이들만은 배부르게 먹여살렸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에서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굶어죽고 영양실조에 시들어 가도 나라의 지배계층들은 체제옹호만을 매일 외쳐대며 자기 배 채우기에만 급급해 돌아쳤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그때 나라와 체제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필요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고 김정일의 정치는 철두철미 반인민적통치라는 것도 깨달았다. 
 
내가 어린 둘째 아들을 억울하게 땅에 묻은지 1년이 지나간 1997년 8월이었다.

그 날 나는 아침부터 분조소(파출소)에 불려갔다. 사는 것이 너무 어려워 직장에 몇 개월 나가지 않았는데(당시 직장에 나가 일해도 식량배급은 전혀 없었다)그것 때문에 나를 노동단련대(한국의 80년대 삼청교육대와 같은 곳)에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잔인한 세상이었다. 힘없는 사람들은 하소연 한마디 못하고 죽어야 하는 세상이었다.

그날 분주소(파출소)에 불려갔다가 우울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는데 집에서는 열세살이 된 큰 아들애가 귀뺨에 퍼렇게 멍이들어 방안에 누워 있었다.

나는 누워있는 아들애를 일으켜 앉혀놓고 얼굴에 왜 퍼렇게 멍이 들었냐고 따져물었다.

아들애는 울음을 터뜨렸다.

울먹이며 자기가 뒷집의 터밭에서 몰래 강냉이 두 이삭을 따기자고 나오다가 주인에게 붙들려 매를 맞은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래 뭘로 때렸냐?"

울컥 화가나는 나의 물음에 아들애는 우물우물 대답했다.

"처음에는 몽둥이로 하나 때리고 다음에는 주먹으로 때렸어요"

그때 나는 속이 터지는 것 같은 원통함과 가슴이 미여지는 것같은 비애를 느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큰 아들애는 마음이 착했다.

영양실조에 걸려 시들어가는 막내 동생에게 자기 밥(풀에 강냉이 가루를 조금 섞어 끓인것이었지만)을 더 주고는 허기진 배를 끌어안고 종일 방안에 누워 있군하던 애였다.

나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 아들애를 꽉 부둥켜안고 터져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세상이 정말 무섭게 변해간다는 것을 절감했다.

강냉이 두 이삭이 뭐길래.

뒷집 주인도 전에는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이웃들과 나누어 먹군하던,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전대미문의 굶주림은 사람들을 잔인하고 악착같은 냉혈동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악착한 승냥이같은 기질을 가져야 살아남는 세월이 된 것이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해주면 자신이 굶어야 하는 비정한 세월속에 사람들은 인정따위를 더 이상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 유일한 재산이었던 낡은 자전거를 가지고 시장에 나가 강냉이 한 배낭을 바꾸어 왔다.

그것을 한번에 삶아 아들애와 딸애에게 주었는데, 그 날 허기졌던 애들이 맛있게 강냉이를 먹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때부터 한달이 지난 후 열세살이던 큰 아들애는 집을 나갔다.
내가 둘째아들애를 잃고 마음고생하는 것을 봐서인지 큰 아들애는 집을 떠날때 중국으로 간다고 편지한장을 써놓고 갔다.

아들애는 편지에 자기가 없으니, 이제부터는 동생에게 자기몫까지 밥을 배불리 먹일 수있을거라고 썼다.

그후 나도 딸애를 데리고 중국으로 탈북했다.

나는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들애를 찾지 못했다.

큰 아들애를 찾아 중국에서 10년동안 헤맸다.

그렇지만 넓은 중국땅에서 아들애를 찾는다는 것은 숲속에서 바늘찾기였다.

아들애가 살아 있으면 지금 28살이다.

나는 지금도 푸짐한 밥상에 마주앉을 때면 때없이 목이 꽉 메는 것 같은 비애를 느낀다.

배고픔에 시달리다 억울하게 죽은 둘째 아들애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간 큰 아들애를 생각하면 아직까지 살아있는 내가 파렴치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식당같은 곳에서 아이들이 밥먹는 모습을 보면 얼빠진 것처럼 멍하니 서있을 때가 종종 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억울하게 죽은 둘째아들 생각에 혼자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고, 첫째 아들을 만나 그애가 좋은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봤으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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